비몽사몽한 아침 기차
소리가 나를 깨운건지 이 소리를 듣기 위해 깨어난건지
"응급환자가 발생하였으니 의사나 간호사는 6호차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안대를 벗고 정신이 번뜩 든다.
순간 멈칫하면서도 쉽사리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도움이 될까?'
그리고 잠시 눈 붙이던 책을 다시 읽어나간다.
그것이 나의 무력감과 두려움, 죄책감, 불신을 있는 힘껏 표현한 것이었으리라.
죽음을 가까이 마주하며 삶을 마무리하는 스승이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이번이 자신의 마지막 인터뷰가 될 거라며 시작한 이야기.
죽음을 앞두면 죽는 얘기를 써야 하잖아?
나는 반대를 써요.
왜냐? 죽음은 체험할 수 없으니까.
죽음 근처까지만 가지 죽음을 모르니 말할 사람이 없어요.
임사체험도 살아 돌아온 얘기죠.
죽음이 무엇인가를 전해줄 수는 없는거라
그래서 나는 다른 데서 힌트를 찾았어요.
죽을 때 돌아가신다고 하죠
죽음의 장소는 탄생의 그곳이라는 거죠. 생명의 출발점.
다행히 어떻게 태어나는가는 죽음과 달리 관찰이 가능해요.
이어령, 마지막 수업
그렇기에 죽음을 알려하지 말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야 한다고
죽음을 느끼면서 탄생을 이야기하는
얼마 남지 않은 책의 여정에서, 304페이지의 순간
"협심증 관련 약물을 소지하고 있는 승객분은 6호차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이 기차에 과연 NTG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왜 하필 이 대목 앞까지 읽다가 잠을 청했을까...'
'그래서 아까 내가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표를 취소하고 이 기차를 타게 되었구나...'
그리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아버지 늘 기도하던 것처럼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지게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렇지만 얼굴도 모르는 타인이 지금의 나의 누군가가 되었기에 간절히 기도드려요.
그가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볼 수 있게 해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요.
"잠시 안내방송 드립니다. 응급환자 이송을 위해 기차는 오송역에 응급 정차하겠습니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삶 속의 죽음. 죽음 곁의 삶'
한 인생이 죽기 살기로 팔씨름 하며 깨달은 것,
어둠의 팔목을 넘어뜨리고 받은 전리품 같은 것이라 표현했던 그 지혜를
한 인생의 육체의 표현을 통해
그 순간 나에게 강렬한 육감으로 오롯이 흡수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스치는 그림자에서 생명을 다시금 느끼게 했고
나를 서경(書耕)에서 순간 서생(書生)으로 만들어 주었다.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나도 매 순간 엄청난 선물을 받고 있다는 인정을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에 남긴 그의 답변에 편승해 고백해 본다.